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최후 ===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정부로부터 국고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으로 기소당했다. 우선 국고 낭비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지만 결국 유죄로 인정되었다. 소위 반역죄 및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 혐의는 [[루이 16세]]와 함께 유죄로 인정됐다. 판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에는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에, 왕이 아예 [[지적장애]]나 중증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비가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도 이런 경우 왕자나 형제에게 물려주고 말지, 여성의 개입을 허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도 [[살리카법]]이 유효했기 때문에 애초에 여자들이 왕위를 물려받기는 사실상 어려웠고, 그나마 [[퐁파두르 부인]]이나 [[카트린 드 메디시스]]처럼 [[비선 실세]]로 활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마리에 대한 유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왕비는 다이아몬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현대 법학자들이 이 사건의 기록 문서를 찾아 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앙투아네트에게 전혀 죄목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자체도 뭔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루이 17세에게서 증언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혐의를 제기한 것이기는 한데,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던 [[루이 17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가져다가 써먹었던 것. 그 시절의 [[동성애]]나 [[근친상간]]은 기본이 [[사형]]이었다. 물론 혁명정부도 이게 유죄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테니 그냥 왕비에 대한 모욕과 사형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사소한 첨가물이었을 것이다. 이 근친상간 혐의의 고발자인 [[자크 르네 에베르|에베르]]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자, 재판 내내 [[왕비]]의 품격을 지키며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한다. 이때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은 가혹했던 프랑스 사회를 견뎌내면서 악에 받친 시장의 아낙네였다. 사치스럽다고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뻣뻣한 태도를 유지하여 아낙네들의 증오를 받았고, 급기야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말하자 태도가 돌변해서 에베르를 마구 비난하기 시작했다. 몇몇 남성도 그녀를 옹호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혐의는 너무 어설프게 급조되어 만들어졌던지라 도리어 그랬을 거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어서,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죄목을 갖다 붙여 앙투아네트를 죽이려는 혁명 정부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막스 갈로는 재판정이 수치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로베스피에르]]는 '''"에베르라는 바보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평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좀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 결국 한 어린아이가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자기가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말이 어머니와 고모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에 단단히 일조하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결국 국고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같은 혐의로 [[루이 16세]]의 여동생이자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핀 마리 엘렌]] 공주도 사형 판결을 받고 몇 개월 후 처형당했다. 감옥으로 돌아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정부는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정부에 서약한 [[사제]]에게 고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다지 품위있는 대접을 받으며 죽진 못했다. 왕실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 입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하에 [[단두대]]로 이동해 죽은 루이 16세와 달리, 허름한 옷차림에[* 원래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검은 상복만을 입고 있었는데, 혁명 정부가 "대중을 흥분시킨다"며 금지했기에 다른 옷을 입었다. 실제로는 가벼운 흰 드레스와 가장 좋은 구두를 신었기에 허름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그게 왕족의 최후에 어울리는 화려한 옷이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천대받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욕을 먹으며 호송됐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처형 직전 [[유언]]은, [[샤를 앙리 상송|사형 집행자]]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예요."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 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형당할 만한 죄는 아니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벌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격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녀의 삶이라는 특이한 여정을 살펴볼 때,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불행과 저울질해 볼 때 하찮은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 >- 안토니아 프레이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